GJCU 생활수기 공모전

따사로운 동행

최성순 (사회복지행정학과)

장맛비가 걷혀진 오후에 햇살이 무척이나 맑다.

싹둑싹둑, 내 가위질에 잘려나가는 손님들의 머리카락 속에 나의 한 서린 지난날이 담겨있다. 지금부터 그리 멀지 않은 날에도 나는 항상 조바심이 나는 생활을 해왔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그저 울고만 싶었다. 특히 가슴 시리던 어린 날의 슬픈 추억을 생각하면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곤 했다.

남들처럼 학생이 되어 푸른 동산이 있는 학교 교정을 단 하루만이라도 걷고 싶었고, 정돈된 교복을 한 시간만이라도 입어보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꿈길에서도 나는 늘 교복을 입고 낯모를 길을 헤매다 깨어나곤 했다. 그런 날은 눈을 떠서 내가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서, 세상에 보이는 것 중에 하나도 내 것이 없는 것 같아, 내 자신이 지상에서 가장 철저히 버려진 미아처럼 느껴지곤 했다.

불혹은 이미 지난 지 오래 이고, 어느덧 지천명을 넘어선 지도 몇 년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독신이다. 유년기의 고독이 아직 내 몸 구석구석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은 가끔 무엇이 바빠서 결혼도 못하고 살았냐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웃고 말지만 나름대로 무척이나 분주한 삶을 살아왔다.

나는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해서 무 학력자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국제디지털대학교 사회복지행정학을 전공하는 어엿한 대학생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누구보다 더 건강하고 떳떳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내게 있어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은 떠올릴 때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흔히들 말하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나는 한 끼의 밥도 풍족하게 먹을 수 없을 만큼 빈곤한 형편에서 자랐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없어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모래밭에서의 낙서로 대신하곤 했다. 명절에도 양말 하나 선물 받지 못하는 서운함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형편 때문에 챙겨주지 못한 부모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가난이 너무 싫었다. 집안형편 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배움의 끈이 짧다는 부끄러움과 아쉬움은 그렇게 그림자로 내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돈벌이를 해야만 했다. 당장의 생활이 문제였다. 나는 마음을 다잡아 미용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미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관련 상식과 기술을 함께 익혀야 했기 때문에 수월하지 않았다. 학교 공부를 더 했더라면 미용관련 전문용어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너무 커서 자존감도 잃어갔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하지 못해서 언어교정을 위해 학원을 찾아갔었는데, 그곳에서 자신감이 결여 된 나의 정신적 장애가 근본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언어습득에 앞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직장생활과 병행하는 고달픔 속에도 인내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나를 잘 아는 주변사람들의 칭찬과 격려도 이어졌고, 나는 드디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돌파구를 찾게 된 것만 같아 기뻤다. 그 후 나는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했던 어둠의 날들을 모두 접어버리고, 하루하루 푸른 희망의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며 살아가고 있다.
수원시 조원동에 있는 양로원을 찾아 미용봉사를 하는 날은 발걸음이 가볍다. 그 날은 미용실이 쉬는 화요일이다. 내가 찾아가는 양로원은 수녀님께서 운영하시는 무료양로원인데, 어르신들은 내가 나타나면 마치 딸을 대하듯 살갑게 손을 잡아주시고, 미용이 끝난 후에는 달라진 머리가 마음에 드는지 수줍은 표정으로 거울을 보신다. 어르신들의 눈빛에 어리는 순수함과 수줍음은 어린 아가들의 눈망울을 닮아간다. 봉사를 하면서 나도 나이가 들면 그곳에서 나의 남은 생을 의지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세상 어느 곳에선가, 누구에선가 버림받은 것 같지만 그 곳엔 작은 웃음들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무언(無言)으로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요즘의 또 하나의 행복은 ‘해야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중증장애인 평생교육시설인 ‘해야학교’를 접하면서 나는 장애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장애이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 때가 바로 아닌 것이다. 바꿔 말해 장애는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있으며, 다소간의 불편함을 제외하면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나 스스로 절감해왔고 지금도 그것을 체험하고 있다. 나는 ‘해야학교’에서 만난 모든 이들을 사랑한다. 모두가 소중한 가족처럼 여겨지고, 어린 날의 내 모습 같아서 안아주고 싶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정신적 열등감은 마이너스를 초래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극복하여 새롭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 내 자신의 확고한 주관과 인식의 변화만 있으면 주어진 현실이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인생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농부의 땀과 어머니의 정성스런 손길로 만들어진 하얀 쌀밥은 누구에게든 힘의 원천이 되고 맛있는 반찬과 어우러져 포만감을 준다. 나는 이제 누구에게나 쌀밥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몸만 건강하다고 비장애인인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어떠한 계기로 정신장애가 올 수도 있고, 신체의 장애도 겪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더욱 마음을 열고 다다가고, 그들을 통해 나의 모습을 역으로 비춰볼 수 있는 따사로운 동행(同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