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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HOSKO]취업이 절박하다면 이까짓 빗줄기야.. HOSKO 2011-09-04 1260
주변에서 워커홀릭이라는 소리를 종종, 아니 꽤 자주 듣는 나는 오늘도 제법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다가 회사를 나섰다. 그런데 비가 온다. 손에 들린 2단 우산이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기세로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어떻게 집까지 가야하냐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나는 우선 탄성을 내질렀다. 여태 살아오면서 수도꼭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보다 더 굵고 빠르게 내리는 빗줄기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혹시 소나기인가 하는 희망찬 생각을 해보았으나, 길바닥에 어른 발목 높이까지 차오른 구정물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하는 아빠를 반겨줄 토끼 같은 자식들을 생각하자. 저 악천후를 꿋꿋이 뚫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우산을 펴 들었다. 역시나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양어깨가 비에 젖어 무거워지는 것이, 애써 끌어올린 기분을 덩달아 축축 처지게 했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에 있을 때 하늘을 두 동강낼 듯 울리는 천둥번개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가져가 일을 하는 건데’ 하는 소용없는 후회가 문득 들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것이 힘들어 버스를 잡아탄 게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사람들로 복작이는 버스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훑는데,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오늘 안으로 집에 도착할 수는 있는 건지, 슬그머니 올라오는 불안감을 털어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항상 바쁘게 돌아가는 곳인 강남은 10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각에도 쉬는 법이 없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비정상적으로 물을 토해내는 하늘 덕분인지 조용한 것 같았다. 내가 회사를 나와 그랬듯이 다들 당황스러움과 근심을 품은 채 보금자리로 돌아가느라 바쁜 듯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기운을 뺏긴 것 마냥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차라리 걷는 것이 더 빠를 버스의 움직임을 간간이 느끼며, 나는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렇게 억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약 8년 전, 내가 아직 이 일을 시작하기 전의 일이다. 평소 친분이 있던 정 교수에게서 부탁을 하나 받게 되었는데, 자기 제자를 미국 특급호텔로 보내고 싶으니 직접 일해 본 경력이 있는 내게 중간에서 연계를 좀 해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나대로 공부를 틈틈이 하면서 강의를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터라 그에게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 2006년, 미국의 리츠칼튼호텔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의 청년들과 함께한 리츠칼튼 직원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만나서 봐 주게. 자네도 그 친구를 보면 꼭 도와주고 싶을 거야.” 끈질기리만치 여러 번 간청하는 정 교수에게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나는 결국 그가 그리 칭찬하는 학생을 만나 보기로 했다. 그 친구와 약속한 날 아침,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늦을 것 같다는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그 때 나는 목동에서 오피스텔을 하나 얻어 교육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강의 원고를 작성하다가 밖의 상황을 잘 몰라서 직원에게 비가 얼마나 오느냐고 물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하나 뚫린 것처럼 내려요, 대표님. 어제부터 비가 많이 와서 지하철 운행도 안하고, 한 시간 째 버스도 안 옵니다.” 그제야 창문을 살짝 열어 본 나는 정말 장대비가 거침없이 쏟아지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오늘 10시에 오기로 한 그 친구도 다소 늦어지거나, 집이 멀다면 올 수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오늘 뵙기로 한 김준수입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약속 시간을 5분 남겨둔 시각에 벨이 울려서 문을 열었더니, 단정한 인상의 청년이 꾸벅 인사를 했다. 정 교수가 말한 대로, 그는 하고자 하는 열의가 넘쳤고 외국어를 구사하는 데에도 부족하지만 자신감이 넘쳤으며 미국 특급호텔, 특히 리츠칼튼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한 듯 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이런 악천후에도 약속시간을 어기지 않은 그에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기본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다. 어쨌든 미국 리츠 칼튼 호텔 현지에 한 번 연락을 넣어봐서 이 친구를 보낼 수 있나 시도는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이력서를 다시 살폈다. “집이 수원인가? 그런데도 이 날씨에 용케 잘 왔군.” 그의 거주지가 눈에 들어와 흘러가는 투로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에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그는 나를 제 시간에 만나기 위해 어제 미리 근처에서 잠을 자고 왔다는 것이다. 아, 순간 나는 그저 ‘해봐야겠다’ 라고만 마음먹은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친구는 자신의 꿈을 위해 성심성의껏 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내 할 일에 급급해 그의 절박함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내 손길이 얼마나 값진 결실을 일구어 낼 수 있는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근처에서 왔음에도 많이도 젖었는지 진한 색으로 변한 어깨부분이 유독 눈에 띄는 외투를 다시 걸치고 연구실을 나서는 그를 보며, 나는 꼭 이 일을 성사시키리라 다짐했다. 그로부터 2개월 동안 나는 틈틈이 여기저기 연락을 넣고, 미국취업 프로그램을 짜고, 미국에도 다녀오면서 해외취업을 보낼 계획을 바쁘게 진행해 나갔고 결국 그 친구를 비롯한 다섯 명의 학생을 미국으로 무사히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소개시켜준 젊은이들이 매우 잘해나가고 있다는 미국 현지 리츠칼튼 인사담당자의 말을 들으며, 그동안의 노고를 모두 보상받는 듯한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취직했던 기간 내내 성실했던 그 친구는 계약했던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재계약을 할 수 있었고, 현재는 미국내 리츠칼튼 호텔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며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여 보람찬 삶을 살아 나가고 있다. 그 이후로 드문드문 지인교수들의 추천으로 해외 취업을 성사시키던 나는 점차 그 횟수를 늘려가다가 결국 이 사업에 뛰어 들어 지금에 이르렀다. 일을 할 때마다 종종, 그리고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상기해보곤 하는 이 기억은 내가 이 일을 업으로 삼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도움이 매우 값진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음을 깨닫고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품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회상에서 깨어나 버스에서 내린 나는 여전히 거세긴 하였으나 아까처럼 막막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빗속을 뚫으며 집으로 향했다. 젊은이의 열정을 되새긴 터라 그런지, 축축 쳐졌던 기분은 끈적이게 젖어드는 옷과는 반대로 가벼워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그 친구한테 안부 메일이라도 한 통 보내야겠다. 글/홍성민 호텔경영학박사 ----------------------------------------------------------------------------- 이 글을 쓴 홍성민 박사는 해외 호텔 인턴 및 취업 컨설팅 전문기관인 호스코의 대표로 현재 (사)선진노사위원회 해외취업사업팀 팀장을 맡고 있다. 호스코 바로가기 - www.hosko.co.kr